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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간은 집착의 존재다(빌려 온 것)
작성자 :  한원식
조회 : 6292
작성일 :  2017-08-07 19:58
     
인간은 집착의 존재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무소유’라는 단어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무소유’는 법정이라는 승려가 쓴 책의 제목이며 그가 깨달은 자유와 행복을 위한 삶의 길이기도 하다.
‘무소유’는 말 그대로 하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구조로 되어 있는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소유 없는 생존이 가능할까?
그래서 그런지 법정 승려는 자신이 말한 무소유를 단어 그대로의 의미인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한다.
아마 생존을 위한 소유는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그도 부인할 수 없었으리라.
또한 그가 무소유라고 해서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쯤 하면 법정 승려가 말한 무소유는 그 의미가 조금 모호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불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되기에 소유한다.
다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보고 ‘나도 갖고 싶다’는 충동적 욕망에 의한 것이 많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충동적 욕망을 자제하는 절제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법정 승려는 무소유의 자유와 행복을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계기를 난초에 집착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집착의 괴로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었던 난초를 친구에 줌으로써 해방감을 맛본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얘기 또한 나에게는 찝찝함을 남긴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대로라면 자신에게 집착의 괴로움이 되는 것을 친한 친구에게 떠넘긴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법정 승려의 친구가 난초를 기르지 않던 사람이라면 법정이 준 난초로 인해서 없던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이고, 난초를 기르던 사람이라면 집착을 더 추가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결론은 법정 승려는 자신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친구에게 집착이라는 괴로움을 안겨주는 결과가 돼 버린다.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친구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집착과 번뇌로 밀어 넣었다는 이 같은 사실을 법정 승려 그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인가?
그는 집착이라는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인이 되는 난을 버린다.
그러나 그 버림은 또 다른 사람에게 집착을 안겨준 원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해결책은 난을 마당에 심어 놓고 죽든 살든 관심도 주지 않던가, 아니면 죽도록 방치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것을 부처로 보는 불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정 승려의 무소유는 인간을 알지 못한 가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해결책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집착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법정 승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큰 오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무소유라는 자신에게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정은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라는 말을 한다.
뭔가를 갖기 위해서 버린다는 아이러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법정승려는 보이는 사물이 자신을 집착으로 이끌어 간다고 여기고, 그 사물을 자기 수중에 두지 않음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맛보고자 했지만, ‘과연 인간이 수중에 있는 재산을 버린다고 해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봐야 한다.
불교 용어에 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겉으로 보면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즉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세상에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육신의 시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이지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인간은 죄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뱀이 인간에게 접근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함으로써 인간을 ‘되고자 하는 자신을 향한 욕망과 집착’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이 죄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을 향한 이 집착을 끊임없이 토해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 역시 자신을 향한 집착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법정 승려의 무소유 또한 인간의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한 부분일 뿐이다.
법정의 무소유 개념은 소유가 집착을 부르고 집착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지만, 사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나’라는 자기 주체를 향한 집착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한 내용이다.
하나님 앞에서는‘나’라는 주체가 주장될 수 없는 것이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오직‘나’라는 주체에 집착을 한 채 자기만을 위한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것에서 감사가 있고 만족이 있는 행복을 놓치고 사는 것이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야 죄의 문제와 인간의 현재성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과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하지만 불교는 인간을 있게 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분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은 존재 한다’는 실존으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에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때문에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뭔가? 라는 문제가 나올 때, 인간 밖의 환경과 조건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게 되고, 법정 승려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이라는 답을 내리게 되면서, 결국 해결책으로 ‘인간을 집착으로 이끌어 가는 소유를 버리자’라는 사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소유를 지향한 법정 승려의 삶 자체를 두고 평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의 무소유 사상에는 냉소를 던지고 싶다.
소유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구조에서는 관념적이고 이상에 지나지 않은 사상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법정의 무소유 사상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를 거북스럽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냉소를 던지고 싶은 것은 집착은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는 악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그의 시각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있는 것을 버릴 생각이 없다.
물론 어려운 이를 도울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집착에서 해방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고의로 버릴 뜻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법정 승려의 자기를 향한 집착은 그가 남긴 유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죽을 때 더 이상 글 빚을 지지 않겠다며 자신이 쓴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러한 유언을 두고 세상은 끝까지 무소유의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을 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조문을 했다고 하니 법정 승려의 ‘무소유’라는 한마디의 말에 온 세상이 속고 있는 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신의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은 죽어서까지 무소유를 지향한 인간으로 남기를 원하는 지독한 집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남겨지기를 원하는 욕망일 뿐이다.
또한 자신의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쓴 글까지도 자기 것으로 소유한 자의 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글을 자신이 썼다고 해도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면 절판의 유언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절판을 하든 안하든 그것은 세상에 남은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정 승려는 자신도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즉 법정 승려가 말한 무소유는 가짜라는 것이다.
법정이 진심으로 무소유가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무소유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에서 이미 자신이 자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무소유는 자신조차 소유하지 않는 것임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을 알았다면 그는 감히 ‘무소유’라는 말은 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까지 버리는 무소유는 실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법정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걸림돌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불행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다만 수중에 있는 것만 버리면 무소유가 실천되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앞의 글에서 언급한 대로 나는 그의 ‘무소유’에 냉소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이 법정의 ‘무소유’를 아름다운 삶이라고 추앙하지만, 만약 법정의 무소유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실천하고 따른다면, 아니 절반이라도 그렇게 한다면 세상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과연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삶을 실천하기 때문에 세상은 참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말 그대로 천국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의 발전은 무소유를 지향하는 인간이 아니라 더욱 발전하고 강해지기를 원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에 의해서 되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정 승려가 말한 무소유는 그냥 개인의 취향으로만 여겨주면 될 일이지, 마치 그것이 우리가 실천하고 따라야 할 삶의 덕목인 것처럼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법정이 말한 무소유가 소유 전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해도, 그가 진심으로 무소유를 지향했고, 또한 무소유가 곧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면 한국의 모든 절과 승려들을 향해서 외쳤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도 지내지 말라고 말할 만큼 무소유를 지향했다면, 해마다 석가탄신일에 떠들썩하게 벌리는 행사까지 모두 없애도록 요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무소유는 단지 한 개인의 생활로 끝나 버리고 만다.
결국 세상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쨌든 무소유라고 할 수 없는 무소유에 온 세상이 들썩이는 모습이 어이없을 뿐이다.
그것도 절대로 법정의 무소유를 따르지 않을 사람들이 말이다.
 
성경적 시각으로 본 버림의 행위와 무소유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소유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소유라는 말은 소유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인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인간에게 ‘소유가 있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소유가 있다’는 말이 성립이 된다면 무소유라는 말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소유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 되심을 거부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말일 뿐,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는 통용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법정 승려가 말하는 무소유는 기독교 시각에서 본다면 신의 자리를 독차지 하고 있는 육의 인간에게서 나오는 말에 불과할 뿐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에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내 몸이고, 내 수중에 있다는 이유로 내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감히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몸도 내 재산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인데, 그런데도 내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숨 쉬는 것, 걷고 있는 것, 말하고 듣고 먹는 것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이 베푸시고 허락하심으로 누리고 있는 은혜의 흔적들이다.
내 뜻대로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내가 나의 의지를 가지고 말하고 걸으며 행동한다는 것 때문에 내 뜻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교만이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못하기에 병이 들기도 하고, 삶을 내 뜻대로 못하기 때문에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이 하루 세끼 먹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일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 내 것은 없다.
내 것이 없기에 ‘무소유’라는 말 또한 인간이 내 놓을 수 있는 말은 아닌 것이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내 것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았던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보다는 조금이라도 나를 위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살았던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마19:27절에 보면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 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을 한다.
베드로와 함께 주를 따랐던 제자들은 하던 일도 가족도 모두 버린 채 주를 따른 사람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 역시 무소유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는가?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것이다.
가치 있는 일을 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기는 했지만 자신을 위해서 버렸을 뿐이다.

이것이 법정 승려와 다르지 않다.
법정 승려 역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버리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고 말씀한다.
예수님도 버림을 말씀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버림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버림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무소유는 법정 승려의 무소유와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버림의 의미 자체가 다른 것이다.
세상은 버림을 가치 있는 행동으로 인식한다.
소유지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림을 실천하는 것은 소유하기 위한 일반적 행동과는 다른 우수한 인격적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 역시 인격과 도덕이 그만큼 수준 높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버림’을 실천하는 사람을 훌륭한 인격자로 칭송을 하면서 천국은 마치 그런 사람을 위한 곳인 것처럼 착각을 한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행위를 과시하면서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도 세상의 시각에서 자기 행동의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행동에는 그에 상응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 인간의 계산이다.
인간은 이러한 계산을 토대로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의 버림이라는 행동도 법정 승려의 무소유를 위한 버림의 행동도 자기를 위한 행동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의 무소유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버림을 말씀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 이름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과 충돌된다.
예수님은 이 충돌을 통해서‘버림’이라는 고상하고 훌륭한 행동조차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확보해줄 수 있는 방편이 되지 못함을 드러내신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는 말씀은 베드로의 버림의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또한 버림에 대한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라면 인간에게는 자신의 전부를 의미한다.
그런데 자신의 전부를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이름을 위해 버린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창출될 수 없는 아주 낯설고 생소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해서 베드로의 버림은 버림이 아니며 자기 이름의 가치를 위한 인간의 여러 행위 중 하나로 드러난다.
법정의 무소유를 지향하는 행동 역시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자기 존재 가치를 위한 인간의 여러 실천과 행위 중 하나로 규정될 뿐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실천이 있는 인간을 원하시지 않는다.
만약 예수님의 버림의 의미를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을 개인적 결단과 의지에 의한 자기로부터의 단절, 또는 다른 사람에게로의 이동으로 이해한다면 베드로의 버림이나 법정 승려의 버림과 동일한 맥락에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버림이 구제와 같은 도덕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버림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내어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을 버림을 위해 가난한 다른 기독교인에게로 이동시킨다면 그 사람은 가진 자가 될 것이고, 따라서 그도 버림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또 다른 이에게로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인끼리 주고받는 행동이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어야 한다는 모순적 논리가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을 소유의 버림을 통한 무소유를 지향하시는 분으로 오해하게 하는 구절이 또 있다.
마 1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계명까지 모두 지켰다고 장담하는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청년에게 소유의 버림, 즉 무소유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만약 예수님이 청년에게 무소유를 원하셨다면, 무소유가 곧 영생의 길이라는 뜻이 된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으니 문자대로 하면 무소유가 영생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청년은 돈이 많아 무소유를 실천하지 못했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무소유를 실천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영생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청년이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한다.
청년이 소유를 버리지 못한 원인이 재물이 많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재물이 적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법정 승려가 들었다면 혹시‘나는 소유의 버림도 실천한 사람이다.’라고 반응하지는 않았을까?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소유를 실천하라는 내용이 아니다.
청년이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가’라고 묻는 것은 자신이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전제로 한 물음이다.
이것은 청년이 인간의 본질 자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찾았다는 증거다.
인간의 본질은 천국 갈 자격이 없고 영생을 얻을 자격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이다.
오직 멸망에 해당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 가치에 무지했기 때문에 영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인간의 존재 가치에 무지한 사람은 자신을 실패하면 안 되고 낮아지면 안 될 사람으로 여긴다.  
그래서 청년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등을 돌린 것이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소유로 인한 힘을 내려놓는 것이다.
즉 힘없는 약자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청년이 재물이 많아 근심하고 돌아간 것도 많은 재물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재물이 많든 적든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게 보면 많은 재물로 인해서 권력과 힘을 누려왔던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근심이 된 것이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인간에게 영생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청년이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해도 영생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해도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소유는 소유를 버리는 실천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상에 머리 둘 것도 없으신 예수님
마8장에 보면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말하는 서기관에게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한다.
이는 마치 ‘나를 따르려면 나처럼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소유 정신을 가르쳤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기독교도 불교처럼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실상은 무소유 정신보다는 오히려 소유 지향적으로 나아가는 면이 많고, 카톨릭이나 불교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승려, 또는 성철 승려와 같은 이들로 인해서 무소유 정신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독교가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소유가 없거나 소유를 버린 자만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지금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마음 편하게 잠잘 곳 하나 없는 노숙자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말씀은 소유가 없는 가난이나 청빈의 길을 가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예수님이 머무를 집이 아니란 뜻이다.
세상은 죽은 자들의 세계이고 악한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원히 머무르실 곳은 하나님의 나라다.
따라서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은, ‘나는 가난해서 나를 따르면 고생이 많을 것인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는 뜻이 아니라 ‘네가 나처럼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계로 바라보면서 나를 따라 세상에서 떠나는 길을 가겠느냐’는 뜻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소유가 없고 거처할 곳도 없이 떠돌아다닌 나그네가 아니었다.
이 땅에 대한 모든 미련과 집착을 포기하고 산 속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나그네가 아니었다.
‘무소유의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인간의 이상향에 의한 착각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산 속에서 도를 닦고 있으면 사람들 사이에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없어지고 세상에 평화가 도래 할 것 같은가? 인간사회에서 진정한 무소유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산 속에서도 산삼을 보면 서로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를 전도자로 파송하면서 돈 주머니와 신발을 갖고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 역시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감화시키라는 뜻이 아니다.
전도는 세상의 힘과는 무관한 것임을 세상에 나타내고 제자들 또한 배우라는 뜻이다.
베드로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는 말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은과 금과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자임을 말해준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한다.
소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다.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무소유는 소유를 버리는 자신을 바라보지만, 신자의 무소유는 이상적인 삶을 실천하여 자기 이름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소유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에 있다.
 
구약에 나타난 무소유의 의미
무소유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여호수아 1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는데, 유독 레위 지파는 기업 분배에서 제외된다.
그러면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게 되는가?
아니다. 수 13:33절을 보면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대로 레위 지파가 기업 분배에서 제외 된 이유는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독 레위 지파에게만 기업이 되어주시고, 다른 지파에게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시는가?
만약 레위지파처럼 모든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가 기업이 되어주신다면서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신다면 당장 이스라엘의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일단 광야에서처럼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 만나가 내려져야 하고 이스라엘은 계속 만나를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생존을 위한 노동도 없이 하늘에서 주어진 양식으로 육신을 지탱하며 하루하루 사는 삶이야말로 사실적 무소유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소유가 없이 평생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를 먹으며 산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삶의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소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파에게 땅을 기업으로 분배 하시고 대신 레위 지파를 세워서 참된 기업은 땅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것을 이스라엘 안에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되 땅을 소유해서는 안 되고, 땅을 힘으로 의지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이방나라와 다른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참된 이스라엘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을 명하셨다.
토지는 여호와의 것이고 이스라엘은 나그네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레 25:23)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희년이라는 제도를 두신다.
가난으로 인해 기업의 얼마를 판 후 여전히 가난하여 다시 무를 힘이 없을 때 50년째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형제의 땅을 산 사람은 그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다.

희년의 제도 아래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유가 없다.
설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영원한 소유가 못되고 희년이 되면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항상 인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희년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땅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자기 소유를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 더 강하기 때문에 결국 희년은 사라지고 대신 약자와 강자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세속의 길을 갔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참된 이스라엘을 건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신 이스라엘, 그들이 바로 참된 무소유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들에게 기업은 땅이 아니라 여호와시며, 땅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류민, 나그네로 산다.
 
무소유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나그네로 사는 것은 시공간적으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즉 가정과 집을 떠나 東家食西家宿하면서 떠도는 것을 나그네라 하지 않는다.
나그네는 자기의 집을 잠시 떠나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기에 나그네로 살면서도 마음은 항상 돌아갈 집을 향한다.
만약 마음이 돌아갈 집으로 향하지 않고 여행지에 자신이 거할 단단한 터전을 만드는 것으로 채워진다면 그는 나그네가 아니다.
세상에 머리 둘 곳을 만들기 위해 사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신자는 세상을 보는 시각, 즉 가치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천국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머리 둘 집이며 본향이다.
세상이 삶의 중요한 터전이 된다.
따라서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다만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재성만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 때문에 오직 자기를 위한 삶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들의 걱정과 염려는 자연히 세상에 존재하는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육신과 연관된 모든 것으로 이어진다.
돈, 건강, 자식, 사업, 명예, 권력, 자존심, 체면과 위신 등으로 자신을 지탱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무너지면 자기 존재 가치와 인생 자체가 무너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유의 상실’은 두려움이다.
소유가 곧 힘이 되는 세상에서 상실은 힘을 잃은 약자의 자리로 내려앉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번듯한 머리 둘 집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 힘이 되고 자랑이 되어줄 집을 안식처로 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집이 무너지면 살 소망까지 무너지기에 세상의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집착으로 인해서 인간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며 이것을 삼독(三毒)이라고 하면서 괴로움의 근본원인이 되는 것으로 말한다.
이처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은 수없는 갈등과 괴로움 속에 살게 되는 데 그것을 백팔번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를 스스로 극복함으로써 평온한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이상이다.
이러한 열반의 경지를 위해서 불교는 끝없는 수행을 하는 것이고, 이러한 수행에서 가장 방해되는 것이 집착이기에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또 다른 목적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 승려는 자신에게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버린다.
버림을 통해 무소유를 이루고, 무소유로 인해 집착에서 해방된 자유와 평온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무소유라는 이상적 인간을 표방하는 말에 속아 열광한 것뿐이다.
육신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여 영광의 몸이 되기 전까지 인간은 육신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다.
비록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는 벗어나고, 또 모든 소유를 버릴 용기는 있을 수 있어도 자기를 향한 집착은 이길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무소유는 천국이 본향이었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부활의 몸만이 영광된 것이기에 육신은 단지 흙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부활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세계에 있는 신자가 비록 지속적이지 못하고 완전하지는 못해도 삶의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자유의 세계를 소망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참된 무소유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무소유는 소유의 버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소유는 소유의 전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법정 승려의 무소유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분명하게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법정 승려가 말한 무소유는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실천이 가능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는 말씀을 하신다.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버림이 아니라 모든 소유를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전부를 버리는 무소유를 실천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즉 인간의 실천으로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세상의 시각에서 별 볼일 없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사회적인 지위와 힘이 보장되는 위치라면 그것을 얻기 위해 버림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제자 됨을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 되는 것은 인간의 실천과 의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능력이 신자를 주께로 끌어가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가 모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주만 바라본다.
주가 머리가 되시고 머리되신 주께 소유된 자들의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장악하거나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없고, 인간의 이름과 영광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소유욕은 물질만이 그 대상이 아니다.
힘, 권력, 영광 이 모든 것이 소유욕의 대상이다.
그 모든 것을 소유화함으로써 더욱 가치 있는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자 기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신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로 세상에 남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은 무가치 암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 앞에 인간의 의는 의가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무소유다.
이처럼 법정 승려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자기 비움을 통하여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무소유를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존귀함과 위대함을 확인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말씀하신다.
십자가 아래서 인간의 의와 영광은 헛된 것임을 알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영광이 됨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무소유를 말씀하신다.
이런 무소유로 인해서 사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참된 자유를 누린 것이다.
물질의 버림이 아니라 자기 부인으로 인한 자유다
신자는 십자가의 능력 아래서 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소유의 삶이다.
물질을 버리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할 수 있어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야 말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참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위 구절을 두고 헌금을 강조하시는 내용이 있었는데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문제는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교회가 없었다.
마태복음은 종종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해석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이다.
 
눅 12:33-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그러나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무소유의 원조인 셈이다
 
눅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즉, 구원을 얻을려면 무소유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눅 12 :29-31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두 구절도 마찬가지다. 
같은 내용인데 마태복음이 한 줄 더 있다. 
마태는 마음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주 헷갈리게 합니다.
원래 "가난한 자"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인데(복음서 전체를 비추어서)마태는 심령에까지 확대 시킨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서 아주 사실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복음서를 적었다.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눅 6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같은 내용인데 마태복음은 "아버지의 뜻" 이라고 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게 하지만. 누가는 쉽게 설명한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되는 부분이 많은데 복음서 전체를 보아서 누가복음쪽이 실제로 예수님께서 한 말씀과 가깝다고 보면 될것이다.
예수님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천국을 선포하셨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나 성경으로 보나 무소유는 예수님의 지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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