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구원받은 자의 삶!
행15;1-11(2011-10-02)
1,구원은 마귀가 싫어한다
2,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3,구원받은 사람들의 삶!
옛 어른들의 말에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그 세 살적 버릇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한 번 버릇이 들면 고치기가 힘들다는 뜻에서 생겨난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좀처럼 참된 복음의 진수로 동화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었다.
마치 소금에 절인 무장아찌처럼 율법의 소금에 푹 절어진 사람들이었다.
즉 율법을 지키고 또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저들의 과거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하여 늘 불만족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불만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와서 율법적인 믿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 가르침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할례를 받는 일과,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일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구원을 말한다면 이는 경계의 대상이 라기 이단(異端)이다.
오늘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과 단체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또 자신들의 믿음과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다르면 정죄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믿음이 늘 성경적인가를 되돌아보는지?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경적일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수도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늘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여러분들을 살아야 한다.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그런 잘못된 삶을 믿음의 후배들이 바른 것인 양 뒤따라오면서 배운다면 어떻겠는가?
성경에 소경이 소경은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다고 했다.
나 하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도 불행이지만 다른 사람을 빠지게 한다면 목에 연자 맷돌을 달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노파심에 말씀을 드리는데 여러분들의 믿음을 고집하지 말고 여러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가를 늘 되새겨 보아야 한다.
오늘의 말씀은 분별없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믿음의 고집을 꼬집고 있다.
1,구원을 마귀가 싫어한다.
안디옥교회가 부흥할 때 그릇된 부패의 가라지 싹이 알곡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좀 거들먹거리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부모들 때부터 잘못된 버릇이 하나의 전통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잘못된 부모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버렸기에 후손들은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사실은 사도 바울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고 자기와 다르다고 남을 격멸했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지켜 온 믿음의 전통도 매우 중요하다.
그 믿음이 성경적일 때 얼마나 더 귀한 것인지는 말로도 다 형언을 할 수 없이 중요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이지를 못할 때는 보이지 않게 또는 드러나게 미치는 악영향은 초대교회 때 바리새파들의 것들보다 더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들은 항상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경적인가를 늘 살펴야 하고,
또 여러분들의 믿음이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도 함께 점검을 해야 한다.
하나 더 여러분들이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될 때에도 항상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에 와서 방송매체를 통한 설교가 홍수 같이 쏟아지는 세상이라 좋기도 하지만 위험천만한 일도 있다.
거기에 등단하시는 분들은 거의 가 다 요즘 말로 대형교회 설교자들이다.
또 설교 때 배경도 흉내 내지 못할 어마어마한 풍경들이다.
개척교회나, 아주 작은 시골교회 설교자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어쩌다가 뉴스거리가 될 만한 간증거리가 있는 분이라면 초대가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엄연히 교파는 있는데 방송에는 교파가 없다는 사실이다.
안디옥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바리새파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파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일이 좀 김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엄청난 구원을 받는 일에 구원을 받는 내편에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음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구원을 받은 일에 전통적으로 행해 오던 할례를 생각해 낸 것이다.
할례가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래도 구원 받는 인간 편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가르침 외에 다른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을 했다.
그 때 바리새파계통의 사람들이 그 일에 동참을 한고 나서자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평화스럽던 안디옥교회가 대 수라장처럼 되어버렸다.
바로 그 때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들렸다.
물론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기 위하여 많은 변론이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결론을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교회의 대표를 예루살렘에 파송하여 최종적 유권해석을 얻기로 했다.
예루살렘교회는 중진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예루살렘교회의 중진회의까지 바리새파사람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교회가 구원의 역사로 부흥 성장하는 일을 마귀가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가 구원의 역사로 부흥할 때 사탄의 역사가 늘 있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늘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탄의 역사를 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
2,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늘의 중대 사건에서 예루살렘교회의 대표 격이었던 사도 베드로의 중대한 발언이 있었다.
베드로는 몇 년 전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되었던 사건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과 동일하게 성령이 임하고 회개의 역사가 있었고 또 구원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다 같이 동일하게 허락하신 것임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똑 같았음을 강조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교회는 구원 문제로 이방인들에게 메지 못한 멍에를 메우지 말아야 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쉽게 말해서 자기의 믿음을 고집하지 말고, 또 자기의 전통 같은 것도 고집하지 말고 자기의 믿음이 성경적인가를 생각하자!
더 나아가서 베드로 같은 말씀의 충만한 권위자가 되자!
베드로처럼 기도 많이 하는 자가 되고,
베드로처럼 성령으로 늘 충만한 자가 되고,
베드로처럼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자가 되자!
여기 모인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무리들이다.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목숨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루는 제자들에게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물으셨다.(마16:26)
이는 구원이 이간의 지상 최대의 과업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이야말로 인간의 최대의 과업이요 최대의 명제요 최대의 축복이다.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구원역사(救援歷史)"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조물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국적이나 피부색갈이나 그 어떤 것도 구원의 구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출신성분이나 자라온 배경이나, 또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구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방법이 아니라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여러분들에게 남달리 특별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사람들이 구원 문제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려 했다.
구원문제를 두고 바리새파사람들이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구원이 사람 편에서 그 어떤 요건이 요구된다면 구원을 얻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는다.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구원파들의 잘못된 주장 같은 것들...
구원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행위가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약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 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안디옥교회가 구원의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어지럽게 되었다.
유대인 바리새파사람들의 쓸데없는 믿음의 우월감 때문에 야기된 사건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를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상급은 인간들의 행위와 관계가 있지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결과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和平)을 누리자
구원은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주어진다.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3,구원받은 사람들의 삶!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유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신 일이 있다.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는 관대한데 남에게는 엄격한 좋지 못한 버릇이 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사람의 버릇을 고칠 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고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오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나쁜 버릇이 있음을 보고 있다.
나쁜 버릇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좋은 버릇도 있다는 의미이다.
버릇이 습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습관이 그 사람의 인격이 됨도 알아야 한다.
세 살 때 버릇을 고치기는 어렵겠지만 고치려는 하는 의지는 꺽지 말라!
어렵다는 말은 고쳐 갈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구원받은 분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기에 나쁜 버릇을 고쳐 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떤 자기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비결은 자기의 경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비결은 자기의 학식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비결은 자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진리는 단순하고 간결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는다고 성경은 말한다.(요3:16)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그 어떤 공로가 아니라 말씀대로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미신적인 믿음으로 예수를 별나게 믿으려는 분들이 있다.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도 자기가 믿는, 자기의 믿음을 강요하는 분들이 있다.
자기의 믿음, 자기의 믿음의 상식과, 자기의 믿음의 전통 같은 것을 고집하지 말라.
언제나 여러분들 자신이 믿음이 성경적인가, 성경적이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무어라고 말씀 하실까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구원의 문제가 말씀이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이러니저러니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형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는가?(구역? 기관? 기타?)
또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있는가?
주님의 일 즉 교회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평화가 있는가?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남의 허물의 발견이 아니라 그를 향한 덮음이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남의 허물의 공포가 아니라 그를 향한 용서이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남의 허물의 정죄가 아니라 그를 향한 사랑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심령에는 늘 주님의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샘솟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마귀 사탄은 인간의 마음에 의심을 주고, 교만을 주고, 또 불신을 주어서 구원의 감격을 도둑질 해 간다.
남을 의심하지도 말고, 남에게 주장하지도 말고,
남들의 믿음과 여러분들의 믿음을 비교하지도 말고,
매일, 매일 여러분이 구원받은 그 믿음을 회복하면서 살아야 한다.
다윗은 시편51:12절에서 기도하기를...
(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면서 기뻐하셨다.
여러분들도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면서 늘 기쁨으로 사시기 바란다.
요즘 여러분들에게서 구원의 기쁨이 식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야 한다.
여러분들에게서 구원의 감격이 식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해야 한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여러분들의 식어져가는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날마다, 날마다 여러분 자신의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어서, 여러분을 지켜보는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용기가 되고,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님께는 크게 기쁨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