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스바의 회개와 에벤에셀의 응답(월)
삼상7:5-12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위기에 놓여 있었다.
첫째의 위기는 정치적인 위기로 이들은 불레셋의 침략앞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며, 두번째의 위기는 종교적인 위기로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였다.
이들이 섬긴 우상은 바알과 아스다롯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위기상황에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였다.
이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다.
본문의 5절과 6절의 말씀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고난주간은 이 미스바의 회개를 본받는 주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치적, 종교적 위기상황에서 먼저 하나님 앞에 모여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회개의 고백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 사회와 민족의 여러가지 위기상황과 부패한 현실에 대해 먼저 책임의식을 느끼고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였듯이 우리도 이 사순절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가 기도할 제목이 너무나도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의 정치를 위해서, 우리의 문화를 위해서, 범죄 없는 사회를 위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땅끝까지 복음 증거를 위해서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간절히 기도한 결과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9절말 씀에"사무엘이 젖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화께서 응답하셔서 이스라엘은 불레셋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며 종교적 타락에서 자신들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12절에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우리는 고난주간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제목이 너무나도 많다.
경제문제, 자녀문제, 건강문제.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것이다.
이러 할 때 우리는 좌절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때일수록 미스바의 회개와 미스바의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민족을 위해 가정을 위해 우리의 심령을 위해 간절한 미스바의 기도를 드려 에벤에셀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회개와 새 사람(화)
엡4:21-24
1,새 사람
사람에게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다.
예수를 영접하기 전의 사람이 옛 사람이다.
물론 새 사람은 예수를 영접한 후의 사람을 말한다.
예수 닮은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
2,옛 사람은 벗어야 한다.
먼저 :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 사람을 벅서야 한다.
옛 사람은 구습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회개는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잘못된 습관은 "유혹의 욕심"으로 썩어져 가고 있는 옛 사람이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이것을 벗어버리기가 어렵다.
오직 성령의 힘을 얻어야 한다.
회개는 성령께서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내 것을 버리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마치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옛 옷을 벗어야 함과 같다.
3,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군 입대를 하면 제일 먼저 군복을 입는다.
4:23 "오직 영이 새롭게 되어"
영이 새롭게 되는 길은 유일하게 회개뿐이다.
회개와 갱신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다.
회개라는 헬라 용어는 '메타노이아"이다.
'메타'는 높인다는 뜻이고, "노이아"는 의식을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의식의 향상을 뜻한다.
의식의 향상은 회개할 때마다 그 사람을 새 사람으로 향상시킨다.
하나님의 화목의 사신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5:17-21).
새사람은 하나님께로 향한 거듭난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와 더불어 사귀고 있느냐에 따라 시각이 다르고 견해가 달라진다.
회개치 않으면 너희도 망한다.(수)
눅13:1-5
오늘의 말씀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석은 일에 대한 말씀이다.
여러 명의 갈릴리 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역사가 Josephus의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심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들 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같이 망하리라"
유대인들의 관점은 죽은 자들이 죄인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들은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으로 회개를 일깨워주셨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들으려고 했던 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살인사건, 열차사고, 선박조난, 비행기사고, 죽음, 등을 말하면서도....?
한편 "이와 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Farrar,Godet), 또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Marshall,Lenski).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3절 5절 반복해서
주님은 회개를 강조 하셨다.
그것은 죄에 대한 인식으로 부터 시작 된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 두 번째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죄를 철저하게 잘라 버려야 한다.
회개야 말로 그리스도와의 진실한 관계의 표시이며, 신자의 특성이 아닐 수 없다.
회개 없이는 죄의 용서나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여러분들은 과연 참다운 회개를 하였는가?
이것이 오늘 말씀에 대한 결론이 될 것이다.
회개한 경험이 있는가?
자신의 죄악을 참으로 깨달았는가?
또 그 죄를 애통하게 생각 하였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눈물로 용서를 구해 보았는가?
또 그 죄의 습관을 잘라 버리고 미워하게 되었는가?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진정으로 이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할 일이다.
영생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회개하지 못하였다면, 지체치 말고 지금 당장 회개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체치 말고 회개하는 성도가 되라고 하신다.
우리는 우리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죄를 더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베드로의 통곡(목)
마26:69-75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건을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나의 이야기다.
베드로는 예수를 죽이려는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빌라도의 법정 뜰에서 부인했다.
그런데 우리는 가정 속에서 부인했고, 직장에서 부인했고, 친구 앞에서 부인했다.
마26:67에"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라고 했다.
침 뱉었다는 것은 멸시를 의미하고 주먹으로 쳤다.
그리고 68절을 보면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며 맞춰보라고 조롱했다,
저들보다도 더 주님을 괴롭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배신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3년씩이나 수행했던 제자들이었다.
병 고침 받고, 빵 얻어먹고, 기적을 목격했던 유대 민중들의 배신이나 조롱에 대하여는 침묵하실 수가 있었던 주님이셨지만 베드로나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는 침묵하실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두 사람의 배신이 마음 아픈 고통이었고 상처였기 때문이었다.
베드로에게는 미리"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고 예고해 주셨고 가룟 유다에게는"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주님에게 있어서 불량배들이나 군중들이 가했던 매질이나 굴욕보다 두 사람의 배신은 더 마음 아픈 사건이었다.
더욱이 베드로의 배신은 견디기 어려운 배신이었다.
그것은 베드로를 사랑하고 신임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기대했던 사람의 배신은 원수의 공격보다 더 가슴 아픈 법이다.
베드로는 법정 뜰에서 큰소리로 갈릴리 사투리까지 섞어가면서 예수를 부인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던 베드로의 호언장담은 말짱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위험 앞에 직면했을 때 베드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발견했다.
조변석개(朝變夕改)란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들이야말로 순간순간 변하고 그리고 뉘우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당돌하게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으며 대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75절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베드로에게 75절이 없었더라면 그는 가룟 유다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는 한 구절 말씀이 위대한 베드로를 만든 것이다.
우린 75 절에서 베드로의 세 가지 행동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생각나서"라는 말씀이다.
그는 주님께서 네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그 말씀이 생각났던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났을 때는 새벽녘이었고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그 닭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주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오늘도 그 닭소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소리를 듣고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고, 생각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의 말씀이 nj생각났지만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마씀이 생각나면 타락했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둘째는"밖으로 나갔기"때문이다.
그는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 곧이어 법정 뜰 밖으로 나갔다.
베드로가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예수를 부인했던 패배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 짓고 살던 그곳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째는"심히 통곡"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선이 베드로에게 닿는 순간 베드로는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심히 통곡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통곡은 대장부의 통곡이었으며 철저한 회개의 통곡이었다"
통회란 말의 뜻은"부스러뜨린다","으스러뜨린다"라는 것이다.
진정한 통회는 나 자신을 부스러뜨리는 것이며 으스러뜨리는 행위이다.
그날 거기서 베드로의 통곡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영적 생명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의 말씀이 생각 날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시간에 머물러선 안 될 곳을 떠날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통곡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통곡하고 새 사람이 되자.
회개하는 강도(금)
눅23:39-43
영국의 설교가 존 라일은 본문을 금빛으로 인쇄할 가치가 있는 말씀이라고 했다.
그것은 무수한 영혼들의 구원의 역사가 되며, 사람들이 성경에 회개하는 강도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영원토록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를 제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곧 강도이며, 사형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으며, 사람을 죽인 일만 무서운 죄라고 하겠는가?
그것이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범죄요, 처단 받아 마땅한 죄이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지 인간 모두는 그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
더우기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모두가 반역죄를 저지를 무서운 죄인들이다.
본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 어떻게 임하는가를 보여 준다.
두 사람의 행악자가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달렸다.
그 둘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여섯 시간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이었으며,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고, 모두가 죄사를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가 살았던 대로 회개하지 않고 완악한 마음과 불신을 가지고 죽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회개하여 주님의 자비를 부르짖고, 구원을 얻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 두 종류의 강도와 같은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불신과 완악함 가운데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회개하여 주님의 자비로 주님과 더불어 낙원에 있게 되는 것이다.
왜 똑같은 설교를 듣고도 한 사람은 회개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무관심 한 것일까?
왜 똑같은 복음이 한 사람에게는 계시되고, 다른 한사람에게는 숨기어 진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강도의 구원을 통하여 아무리큰 죄인이라도 용서가 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바로 진실 된 회개의 특성이다.
A, 동료 강도에게"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자기를 구원 하시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부르짖어 자기를 기억해 줄 것을 간구했다.
이것이 기도이다.
회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 처럼 훌륭한 회개여다
이 강도의 회개처럼열매가 있는 회개가 되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도 속이는 거짓말 가운데 죽어가고 있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는가?
거짓으로 어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우리는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실 된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데,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면 그 같은 분란과 문제들이 있겠는가 생각해본다.
분명히 말하건대 착각속의 회개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구원 하시려는 열심을 가지고 계신다.
강도가 구원받은 그 때는 주님이 가장 연약했던 때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강도의 호소에 구원의 문을 여신 것이다.
죽어가던 이 강도는 직분도 은사도 받지 않았으나 구원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회개하는 영혼을 주님은 받아 주신다.
구원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다.
믿는 자들은 즉시 안식과 영광에 들어간다.
주님은 그 행악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이렇게 말씀 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는 그러므로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니 된다.
오늘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회개가 거짓회개가 아닌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마28:1-10(2010-04-04)
1,안식일들이 다 지나고
2,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3,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지막을 고하는 사건 사고가 너무나도 많다.
특히 중국 쓰찬성의 대 지진
동남아 지역의 쓰나미
대만의 대 지진
아이티의 지진과 해일
칠레의 지진과 해일
러시아의 지하철 테러 사건 등등
그 와중에서도 구조대에 의하여 구사일생으로 구조되는 생명들이 있다.
그 때 구조된 이들을 지켜보는 분들은 한 생이 구조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면서 대서특필 야단들이다.
그런데 정작 top 뉴스로 보도되어야 할 사건이 기껏 지난 한 때의 사실로 이벤트식 기념행사로 그쳐짐이 매우 안타깝다.
1,안식일들이 다 지나고
처참하게 고난당하신 예수님! 가시관? 채찍? 십자가 못 박히심? 옆구리 창?
검시관에 의해 죽임 확인이 되었다.
일부 제자들에 의하여 시신이 무덤에 안장된다.
그런데 정확하게 2,000 여 년 전 오늘 이 새벽에 대 변혁의 사건이 있었다.
참으로 역사 이래 최대의 top news 였다.
그 날 큰 지진이 일어났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때 상황을 정확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보도했다.
마28: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라는 말은"이제 안식일이 완전히 지난 후"가 더 정확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
이날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이 시작한 시점이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2,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은 누군가가 구조대에 의하여 살게 된 것이 아니기에 top new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셨음은 미리 예언 된 말씀대로의 다시 삶이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있음이 축복임은 말씀대로 됨을 ale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대로의 다시 살아나셨음을 하늘의 천사가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계시지 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 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살아 나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롬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 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이었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3:21).
3,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점이다.
갈릴리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임명의 장소이다.
7절"빨리 가서"라는 말씀이 있다.
이 부활 즉 다시 살아나셨음의 소식은 미적미적 전해야 할 소식이 아니다.
빨리 더 빨리 최대한 더 빨리 전해야 사건이다.
서해 연평도 천안함 침몰사고를 놓고 말들이 많다.
구조대응이 잘못되었다는 등, 늦장 대응이라는 등 말이 많다.
소식은 가능한 빨이 전해야한다.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그리고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 갈릴리로 가는 것이다.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하라고 했다.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저들은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다.
부활의 예수님을 뵙기 원하시는가?
부활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란다.
부활의 예수님을 뵙기 원하시는가?
부활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란다.
저들이 말씀에 순종해서 부활의 예수님도 뵙고 또 새 사명을 부여 받는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곳이다.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오늘 우리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의미가 무엇일까?
기념하기 위함일까? 아니다.
축하하기 위함일까? 맞을 수 있으나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많은 분들이 이 예배에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
새 사명을 부여 받기 위함이다.
아직 사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영혼들이 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만난 사람은 새롭게 부활의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오늘 이렇게 귀한 예배를 드림은 새 생명 주신 부활의 예수를 삶으로 자랑하기 위함이다.
혼자만 기뻐하지 말고, 가족끼리만 기뻐하지 말고 이웃이 다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힘 있게 부활의 예수를 증거한다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함께 영육간에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다.